『토지』는 한국 문학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호명되는 대하소설이다. 구한말부터 해방까지 반세기에 걸친 역사를 평사리의 한 집안에서 출발하여 간도와 일본에 이르기까지 펼쳐 보이는 이 작품은, 분량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책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막상 책장을 열면 첫 장면부터 이야기의 힘이 독자를 붙든다. 올해는 박경리 작가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줄거리
이야기는 1897년 경남 하동의 평사리에서 시작된다. 이 마을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닌 최참판댁에는 엄격한 윤씨부인과 병약하고 날카로운 아들 최치수, 그리고 어린 손녀 서희가 살고 있다. 평온해 보이던 이 집안은 며느리 별당아씨가 하인 구천과 함께 도망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어 최치수가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가문의 먼 친척 조준구가 집안의 재산을 차지하면서 서희는 모든 것을 잃은 채 고향을 떠나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서희는 충직한 하인 길상 등과 함께 간도의 용정으로 건너가 재산을 일구며 때를 기다린다. 그리고 마침내 힘을 키워 평사리로 돌아와 빼앗긴 집과 땅을 되찾는다. 이 과정에서 서희와 길상은 신분의 벽을 넘어 부부가 된다. 한편 마을에서는 용이와 월선의 애틋하면서도 비극적인 사랑을 비롯해 수많은 인물의 삶이 서로 얽히며 펼쳐진다.
이야기는 이후 서희의 자식 세대로 이어지고, 독립운동과 일제의 수탈, 전쟁의 그늘 속에서 각기 다른 길을 걷는 인물들의 운명이 교차한다. 작품은 마침내 1945년 해방을 맞이하는 장면에서 막을 내린다. 한 가문의 흥망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어느새 한 민족의 수난과 견딤의 기록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배경과 설정
『토지』는 1897년 하동 평사리에서 출발하여 서울과 만주, 일본을 거쳐 다시 섬진강가로 돌아오는 구조를 취하며, 등장인물이 모두 허구라는 점에서 실존 인물을 중심에 둔 기존의 역사소설과 구별된다. 동학농민전쟁과 을사늑약, 간도협약,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형평사 운동 같은 굵직한 역사적 사건이 배경으로 깔리지만, 정작 소설의 중심에 서는 것은 이름 없는 민초들의 삶이다.
박경리는 1969년에 연재를 시작하여 1994년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작품을 이어 갔고, 작품은 5부로 구성된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이름을 가진 인물만 해도 5백 명이 넘고 등장인물 사전이 따로 만들어질 정도이니, 독자는 한 사람의 주인공을 따라가는 방식이 아니라 마을 전체를 거닐듯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하동 평사리의 들녘과 섬진강, 간도의 낯선 겨울, 진주와 서울의 거리가 인물들의 삶과 맞물려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점도 이 작품의 큰 매력이다.
영상화 정보
『토지』는 여러 차례 영상으로 옮겨졌다. 1974년 김수용 감독이 연출한 영화를 시작으로 KBS가 1979년과 1987년에 드라마로 제작했고, SBS는 광복 60주년을 맞아 2004년 말부터 2005년 5월까지 네 번째 영상화 작품을 방영했다. 1995년에는 광복 50주년을 기념하여 서사음악극으로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오르기도 했으며, 하동 평사리의 드라마 촬영 세트장은 지금도 관광 명소로 사랑받고 있다.
해외에서의 평가도 눈에 띈다. 일본에서는 쿠온출판사가 10년에 걸쳐 『토지』 전 20권의 완역본을 펴냈으며, 이 프로젝트는 제79회 마이니치출판문화상 기획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아직 읽지 못했다면 영상물보다 먼저 원작의 호흡을 경험해 보기를 권한다.
총평
『토지』를 읽고 나면 가장 먼저 남는 질문은 '이 소설의 주인공은 누구인가'이다. 서희가 이야기의 중심 축임은 분명하지만, 작품은 한 인물의 성공담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삶이 실핏줄처럼 퍼져 나가는 구조를 지닌다. 연구자들 역시 이 작품에 따로 주인공이 있다기보다 등장인물 모두가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데 공감한다. 양반과 하인, 농민과 상인, 독립운동가와 친일 협력자가 한 지면 안에서 저마다의 무게로 숨 쉬는 것이 이 소설만의 독특한 힘이다.
주목하고 싶은 점은 인물의 입체성이다. 작가는 악인에게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과 욕망을 부여하고, 선한 인물에게도 결함과 고집을 남겨둔다. 그래서 독자는 누군가를 단순히 미워하거나 동정하는 데 머물지 못하고, 인간이란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지를 곱씹게 된다. 특히 서희와 월선, 용이처럼 사랑과 원한, 체념과 의지를 동시에 품은 인물들은 읽는 이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다.
이 소설을 관통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사랑이다. 제목이 가리키는 '토지'는 단순한 재산이 아니라,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고 돌아가는 삶의 터전이며 모든 생명을 길러내는 근원이다. 땅을 빼앗기고 되찾는 과정은 가문의 복수극이 아니라, 삶의 뿌리를 지켜내려는 인간의 몸부림으로 읽힌다. 일제강점기라는 폭력의 시대 속에서도 인물들이 끝내 삶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은, 이 작품이 오랜 세월 사랑받아 온 이유를 설명해 준다.
문체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경상도 사투리와 토속적인 어휘, 판소리처럼 이야기 사이에 작은 일화를 끼워 넣는 서술 방식은 처음에는 낯설지만 읽을수록 독특한 리듬으로 다가온다. 자연 묘사와 인물의 내면을 함께 어루만지는 문장은 역사소설의 무게와 문학적 아름다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방대한 분량과 많은 등장인물 때문에 초반에는 인물 관계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고, 후반부로 갈수록 이념과 사상에 관한 대목이 늘어나 호흡이 무거워진다고 느끼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완독이라는 부담을 내려놓고 1부만 먼저 읽어 보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이 지닌 이야기의 힘은 충분히 전해진다. 가능하다면 한꺼번에 독파하기보다 계절을 두고 천천히, 한 부씩 나누어 읽기를 권하고 싶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열린 기념문학제에서 한 평론가는 박경리 작가야말로 '토지' 같은 분이라고 말했다. 그 말처럼 이 소설은 한국 문학이 물려받은 가장 넓은 땅이며, 읽는 이마다 자신의 몫을 일굴 수 있는 터전이다. 한국 근현대사를 책 속에서 걸어 보고 싶은 독자, 그리고 오래 곁에 두고 읽을 단 한 권의 대하소설을 찾는 독자에게 『토지』를 가장 먼저 권하고 싶다. 한 부를 덮을 때마다 평사리의 바람이 조금씩 더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