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이 낯선 질문으로 우리를 이끄는 소설,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를 소개하려 합니다. 2017년에 출간된 이 작품은 청소년 소설로 시작했지만 세대를 가리지 않고 사랑받으며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켜 온 책입니다. 작가 손원평은 영화 평론가로 먼저 이름을 알렸고 영화 연출을 공부한 이력이 있는 만큼,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듯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남달랐습니다. 제목의 '아몬드'는 뇌 속에서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의 모양이 아몬드를 닮았다는 데서 따온 것입니다.
줄거리
주인공 윤재는 선천적으로 편도체가 작아 분노도 두려움도 기쁨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소년입니다. 알렉시티미아라고 불리는 증상 때문에 남들이 왜 웃고 우는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엄마와 할머니는 그런 윤재를 사랑으로 보듬으며 헌책방을 꾸려 가고 있습니다. 엄마는 윤재에게 표정과 말을 하나하나 가르치며 '평범한 아이'처럼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 윤재의 가족에게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고, 윤재는 혼자 세상에 남겨졌습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비극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는 윤재를 사람들은 괴물처럼 바라봅니다.
혼자가 된 윤재 앞에 어느 날 곤이라는 소년이 전학을 옵니다. 곤이는 어린 시절 납치된 뒤 입양과 파양, 소년원을 거치며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아이였습니다. 감정이 텅 빈 윤재와 감정이 넘쳐흘러 주체하지 못하는 곤이는 정반대의 존재이면서도 서로에게 묘하게 끌렸습니다. 여기에 육상 선수를 꿈꾸는 맑은 소녀 도라까지 더해지며, 윤재의 세계는 조금씩 낯선 색깔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이 관계들이 윤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는 읽어 보시고 확인하길 바랍니다.
배경과 설정
『아몬드』는 특별한 세계관이 필요 없는 현대 한국의 평범한 일상이 배경이며 학교와 골목, 그리고 윤재의 집이자 가게인 헌책방이 이야기의 주요 무대입니다. 책방이라는 공간은 윤재에게 세상과 연결되는 창이면서, 나중에는 그가 변화해 가는 과정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장소가 됩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1인칭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주기 때문에, 문장은 오히려 건조하고 차분한데도 읽는 사람의 마음이 더 크게 흔들립니다. 슬픈 장면에서 화자는 슬퍼하지 않지만, 독자가 대신 슬퍼하게 되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또 소설은 타인의 고통에는 무심하면서 남의 불행은 구경거리로 소비하는 사회의 모습을 조용히 꼬집었습니다. 정작 감정이 없는 쪽은 윤재가 아니라 우리일지도 모른다는 질문이 책 전체에 깔려 있었습니다.
인물 구도도 눈여겨볼 만한데 감정이 없어서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하는 윤재와, 감정이 너무 넘쳐서 폭발해 버리는 곤이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입니다. 두 사람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다 보면 '감정을 느끼는 것'과 '감정을 다루는 것'이 전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됩니다. 도라는 이 둘 사이에서 밝고 씩씩한 에너지를 불어넣으며 이야기에 숨통을 틔워 주는 인물입니다.
수상과 뮤지컬화 정보
『아몬드』는 해외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어요. 2020년 일본 서점대상 번역소설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는데, 서점 직원들이 직접 투표로 뽑는 상이라 더욱 의미가 크고 이 부문에서 영미·유럽권이 아닌 아시아 소설이 수상한 것은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국내에서도 출간 이후 40만 부 이상 팔렸다고 알려져 있스빈다.
창작 뮤지컬 〈아몬드〉는 2022년에 초연되었고, 3년 만인 2025년에 새로운 시즌으로 다시 관객을 만났습니다. 원작이 윤재의 1인칭 시점이다 보니 곤이와 도라의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적었는데, 뮤지컬에서는 두 사람도 또 한 명의 주인공처럼 입체적으로 그려졌다고 합니다. 원작을 재밌게 읽으신 분이라면 무대 위에서 만나는 윤재도 색다른 감동일 것입니다.
총평
『아몬드』는 '공감'이라는 말이 얼마나 쉽게 쓰이고,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려 주는 책입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가 곤이와 도라를 만나며 조금씩 변해 가는 모습은 화려한 사건 없이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특히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감정을 똑같이 느끼는 게 아니라, 곁에 머물며 끝까지 지켜봐 주는 일이라는 메시지가 오래 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아이들에게만 필요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바쁘게 살다 보면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게 되는 순간이 많은데 윤재는 그런 어른들에게 서툴지만 진심 어린 방식으로 '곁에 있어 주는 법'을 보여 줍니다.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고 문장이 쉽게 읽혀서 독서가 낯선 분들에게도, 청소년 자녀와 함께 읽을 책을 찾는 부모님께도 추천드립니다. 요즘 주변 사람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해 답답하거나, 나 자신의 감정이 무디어진 것 같다고 느끼는 분이라면 이번 주말에 『아몬드』를 꼭 한 번 펼쳐 보시길 바랍니다. 책장을 덮을 때쯤, 내 곁의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건네고 싶어질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