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소설 중에 "줄거리를 설명하는 것 자체가 무모한 짓"이라는 평을 듣는 작품이 몇이나 될까. 천명관 작가의 『고래』가 바로 그런 소설이다. 2004년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이자, 2023년에는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까지 오르며 다시 한번 화제가 된 이 작품을 이번 기회에 완독하고 그 감상을 정리해보려 한다.

줄거리
『고래』는 세 여인, 금복과 춘희 그리고 노파(일명 '붉은 벽돌')의 파란만장한 삶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대서사시다. 산골 마을에서 태어난 금복은 타고난 억척스러움과 야망으로 맨몸에서 시작해 거대한 부를 일구고, 마침내 자신만의 왕국이라 할 수 있는 거대한 '고래극장'을 세운다. 하지만 화려하게 쌓아 올린 그 성취는 인간의 탐욕과 허영 속에서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하고, 결국 금복은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금복의 딸로 태어난 춘희는 말을 배우지 못한 채 자라며, 세상과 단절된 채로 평생 벽돌을 굽는 노동에 자신의 삶을 바친다. 겉보기엔 침묵하는 인물이지만, 소설 속에서 춘희가 지닌 존재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여기에 금복의 옛 동업자였던 노파가 끝없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파멸의 길을 걷는 이야기가 얽히며, 세 여성의 운명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굿판처럼 뒤엉킨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독자를 사로잡는 것은 다름 아닌 압도적인 흡인력이다. 살인과 폭력, 음산한 죽음의 그림자부터 능청스러운 해학과 걸쭉한 입담, 신파극의 과장된 감정 분출까지 도무지 한 소설 안에 다 담길 수 없을 것 같은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치밀하게 짜여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완성된다.
소설 속에는 금복을 거쳐 간 수많은 남자들, 그녀의 사업을 돕거나 방해하는 온갖 인물들, 그리고 상상을 뛰어넘는 기이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마치 전래동화와 민담을 한데 모아놓은 것처럼, 하나의 에피소드가 끝나면 곧바로 또 다른 이야기가 이어지며 독자를 쉴 새 없이 다음 페이지로 이끈다. 읽다 보면 "이 작가는 대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머릿속에 담고 있는 걸까"라는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다.
배경과 설정
『고래』의 시공간적 배경은 근현대 한국의 어느 산골 마을과 그곳에서 뻗어나간 도시다. 구체적인 시대나 지명을 명시하기보다는, 마치 전설이나 설화처럼 모호하고 신화적인 시공간 속에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런 설정 덕분에 소설은 특정 시대의 사실적 재현이 아니라, 한국인의 원형적인 정서와 욕망을 담은 하나의 거대한 우화처럼 읽힌다.
문체 또한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다. 판소리의 유장한 가락을 연상시키는 능란한 입담, 변사의 과장된 말투, 여기에 무협지와 성인만화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까지 고급 장르와 하위 장르를 넘나드는 자유분방한 문체가 소설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평론가들이 이 작품을 두고 "이야기의 백과사전 같다"고 평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구비문학의 전통과 현대적 감각이 뒤섞인 독특한 서술 방식은 한국 문학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스타일이다.
특히 2023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며, 국내를 넘어 해외 독자들에게도 그 독창성을 인정받았다는 점은 이 작품의 보편적인 힘을 다시금 증명해준다.
총평
『고래』는 읽는 내내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지?"라는 질문을 품게 만드는 소설이다. 그러나 그 낯섦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다. 기존 한국 소설의 문법에 빚진 것이 거의 없는, 천명관이라는 작가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이 완성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세 여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의 욕망과 허영, 그리고 그로 인한 몰락이라는 보편적인 주제가 반복해서 떠오른다. 동시에 유쾌한 해학과 처절한 비극이 한 몸처럼 붙어 있어, 웃다가도 어느 순간 서늘해지는 독특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경험하게 된다. 다만 방대한 서사와 수많은 에피소드가 촘촘하게 얽혀 있는 만큼, 가벼운 마음으로 빠르게 읽어내기보다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음미하듯 읽는 편을 추천하고 싶다.
한국 문학이 가진 이야기의 저력을 제대로 느끼고 싶은 독자라면, 그리고 익숙한 소설 문법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서사를 원하는 독자라면 『고래』는 반드시 한 번쯤 도전해볼 만한 작품이다.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읽어도 여전히 그 생명력이 살아 숨 쉬는 이유를, 직접 확인해보시길 바란다.